앵커링(anchor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닻 내리기’라고 번역이 되는데 배가 정박 시 쓰는 ‘닻’ 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충실하면 이해가 쉽다. 배가 항해를 하다가 닻을 내리면 그 배는 닻 주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게 닻의 속성이다. 닻 내리기는 주로 협상에서 많이 쓴다.
이전 회사에서 상대회사와 협상할 때 ‘닻 내리기’를 많이 썼다. 연간단위로 계약하는 회사에 갔을 때 가장 유효한 전략은 ‘혜택 앵커링 전략’이다.
“올해에는 인건비상승, 물가상승, 그리고 추가 장비 구매 등에 있어서 지난해 보다 가격을 좀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격이 아니고 더 많은 혜택입니다. 이번에는 지난해보다 더 멋진 서비스를 듬뿍 준비했습니다.”
부득이하게 가격을 인상하는 요인을 이야기하고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상대회사가 이런 이슈에 집중하기 시작할 때 닻 내리기의 효과가 발생한다.
보통 이 경우 상대회사는 매력적인 혜택을 보고 끌린다. 그래서 그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논의를 한다. 그러다 보니 관심 자체가 가격까지 미치지 않는다. 70~80%에 해당하는 회사는 보통 이렇게 이야기한다.

“혜택이 정말 좋네요. 그런데 예산이 증액까지는 힘들 거 같아요.”

담당자는 정말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예산 상황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닻 내리기의 마무리는 지금부터다.

“귀사와의 관계가 어디 보통관계입니까. 말씀 드린 혜택 중에서 몇 가지는 그냥 무상으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담당자의 표정은 급격히 환해지게 된다. 더불어 뿌듯함까지 묻어나온다. 미팅이 끝난 뒤 그 담당자는 상사와의 보고에서 분명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이런 이런 좋은 추가 서비스를 지난 해와 동일한 가격으로 받아냈습니다.”

상사는 칭찬할 것이고, 담당직원은 우리에게 얻어낸 혜택을 협상업적으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회사는 잃은 것이 있을까?

원래 우리회사의 목적은 가격인하를 막는 것이었다. 우리도 목적을 100% 달성했다. 이 게임의 끝은 윈윈으로 멋지게 끝났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보면 보통 이런 관계로 혜택을 준 담당자는 언제나 보답을 했다. 예를 들면 서비스 대상을 확대한다든가, 폐지론이 나올 때 강력하게 방어를 해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우군이 되어 준 것이다. 가치와 혜택의 닻을 내림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진 사례다.

이 사례는 단순히 회사 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고객은 이런 앵커링에 입각한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고객은 잘 질린다. 그리고 한번 받은 혜택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너무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서 열광하다가도 어느새 심드렁해져 버린다.

다음에 그 고객이 우리 제품을 다시 쓰려고 할 때 그때 우리도 모르게 협상은 시작된다.

한 가게에 갔을 때 담당 직원이 푸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손님들은 참 이상해요. 어제 왔다가 하루 만에 다시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뭐 변한 거가 없네. 휴.. 하루 만에 뭐가 도대체 변해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직원 입장에서는 속이 상할만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요즘의 소비자들이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것은 그 뒤다. 고객들은 변하지 않거나 새로운 것이 없다면 반드시 가격을  깎으려 든다. 요즘 소비현장에는 할인, 세일이 아비규환이다. 안타까운 것은 소비자를 리드할 수 있는 회사들조차 이 가격의 앵커링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가격이 싸서 좋은 것도 쇼핑의 즐거움 중의 하나지만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가격경쟁의 피바다인 일본에서도 도쿄 다이칸야마에 있는 츠타야 서점은 일원 한장 깎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이칸야마 매장이 주는 힐링과 한적함과 분위기에 고객들은 만족하며 정가에도 흔쾌히 지갑을 연다. 이 노세일 매장의 매출은 해당 그룹에서 탑 수준이다.

원가공개라는 제도도 앵커링의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원가공개제도의 장점은 진실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심은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밝혀지는 4차산업혁명의 시기에 금과옥조 같은 미덕이다.

그래서 나는 원가공개를 하는 용기가 엄청나고 대담한 도전이라 생각한다. 지지한다.

그런데 한가지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진실과 진심의 앵커링 지점은 가격일수도 가치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명품은 기본적으로 가치에 앵커링을 내린다. 브랜드의 스토리와 철학과 고집과 몰입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절로 그 브랜드를 사랑하게 되고 더 이상 가격이 제일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 가격컨설턴트인 이시하라 아키라는 소비에는 4종류가 있다고 했다.

‘싸니까 사는 소비’, ‘비싸니까 안심하는 소비’, ‘사물이 아닌 행위를 사는 소비’, ‘나다운 것을 사는 소비’가 그 4가지이다. 언뜻 봐도 가격은 4개 중의 하나의 소비형태일 뿐이다.

원가공개는 가격이라는 소비 영역에서는 성공적인 도전일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세 가지에 대한 부분이다.

직원들 그리고 그 회사를 사랑하는 고객들이 원가표를 들여다보고 이건 왜 들어갔지? 이건 왜 빠졌지? 하면서 가격에만 사고와 논의의 앵커링을 두게 되는 것을 나는 경계한다. 진정한 브랜드라면 가격을 중시하는 소비자도,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자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원가공개를 하는 대담한 브랜드가 있으면, 가치에 목숨 거는 브랜드도 지켜나가야 한다. 저성장기를 이겨낼 각오라면 이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를 다잡을 역량과 각오를 키워야 한다. 원가공개는 그러한 밸런스에 앵커링을 하고 진행될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욱 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동철